와타나베 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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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와타나베 고조는 1932년에 태어나 2020년에 사망한 일본의 정치인이다. 후쿠시마현 의원, 중의원 의원, 후생상, 통산상, 자치상 겸 국가공안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중의원 부의장을 두 차례 역임하며 최장 재임 기록을 세웠다. 자민당, 신생당, 신진당, 민주당 등 여러 정당을 거쳤으며, 탈원전 정책을 지지했다. 2012년에 정계를 은퇴한 후 국민민주당 후쿠시마현연합회 최고고문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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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고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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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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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32년 5월 24일 |
출생지 | 일본 제국 후쿠시마현 미나미아이즈군 다지마정 (현재 미나미아이즈마치) |
사망일 | 2020년 8월 23일 |
사망지 | 일본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쓰시 |
학력 | 와세다 대학 제1문학부 졸업 |
직업 | 국회의원 비서 |
정당 | 자유민주당 (다나카파 → 다케시타파 → 하타파) 신생당 신진당 무소속 무소속 모임 민주당 (하타 그룹) 민진당 국민민주당 |
칭호/훈장 | 정3위 [[File:JPN Kyokujitsu-sho 1Class BAR.svg|40px]] 훈1등욱일대수장 문학사 (와세다 대학) |
친족 (정치가) | 아버지: (선대) 와타나베 마타자에몬 (전 후쿠시마현 의원) 형: 와타나베 마타자에몬 (전 후쿠시마현 다지마정장) |
정치 경력 | |
중의원 부의장 | 제60-61대 |
임기 시작 | 1996년 11월 7일 |
임기 종료 | 2003년 10월 10일 |
의장 | 이토 소이치로 와타누키 다미스케 |
주요 직책 | |
통상산업대신 | 제53대 |
내각 | 미야자와 내각 |
임기 시작 | 1991년 11월 5일 |
임기 종료 | 1992년 12월 12일 |
자치대신 | 제40대 |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 제49대 |
내각 | 제1차 가이후 내각 |
임기 시작 | 1989년 8월 10일 |
임기 종료 | 1990년 2월 28일 |
후생대신 | 제63대 |
내각 | 제2차 나카소네 내각 |
임기 시작 | 1983년 12월 27일 |
임기 종료 | 1984년 11월 1일 |
의회 활동 | |
중의원 의원 | (구 후쿠시마 2구 →) 후쿠시마 4구 |
당선 횟수 | 14회 |
임기 시작 | 1969년 12월 28일 |
임기 종료 | 2012년 11월 16일 |
기타 직책 | 후쿠시마현 의원 [[File:Democratic Party of Japan Logo.svg|40px]] 제11대 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대표: 마에하라 세이지, 오자와 이치로 [[File:Liberal Democratic Party (Japan) Emblem.svg|20px]] 제32대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총재: 다케시타 노보루 |
2. 생애
1932년 5월 24일, 후쿠시마현 미나미아이즈군 다지마정(현재의 미나미아이즈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각각 중의원 의원과 후쿠시마현의회 의원 및 다지마정장을 지낸 정치인 가문 출신이다.[34][35] 후쿠시마현립 아이즈 고등학교를 거쳐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 진학했으며, 대학 시절 웅변회 활동을 했고 자유당 정치인 이시바시 단잔의 비서로 일했다.[36][37]
1959년 후쿠시마현의회 의원으로 당선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으나, 1967년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사임했다.[36][38] 1969년 특별사면 후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후 자민당에 입당하여 다나카 가쿠에이 파벌(칠일회)에 속했다.[39][40] 자민당 내에서 상공 분야 전문가로 활동하며 통상산업정무차관, 중의원 상공위원장을 지냈고, 제2차 나카소네 내각의 후생대신, 제1차 가이후 내각의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 미야자와 내각의 통상산업대신 등 주요 각료직을 역임했다. 1987년에는 다케시타 노보루가 창설한 경세회에 참여하여 다케시타파 7봉행 중 한 명으로 꼽혔다.
1993년, 리크루트 사건과 도쿄 사가와큐빈 사건 등으로 정치 개혁 요구가 높아지자 오자와 이치로, 하타 쓰토무 등과 함께 자민당을 탈당하고 신생당 창당에 참여했다. 이후 신진당 결성에도 합류하여 부당수 등 주요 직책을 맡았다. 1996년에는 중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고, 관례에 따라 당적을 이탈했다. 신진당 해체 후에는 무소속 모임에 참여했으며, 2000년 중의원 부의장에 재선되어 역대 최장 기간(통산 2,498일) 부의장직을 수행했다.
2005년 민주당에 입당하여 활동했다. 2006년 호리에 메일 문제로 당 지도부가 총사퇴했을 때 국회대책위원장을 맡아 위기 수습에 나섰다. 2007년에는 자신의 정치 단체와 관련된 정치자금수지보고서 허위 기재 문제가 드러나 비판을 받기도 했다.[41]
2011년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에는 기존의 원자력 발전 지지 입장에서 탈원전을 주장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42] 2012년 고령을 이유로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를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국민민주당 후쿠시마현 연합회 최고고문을 지냈다.[43]
2020년 8월 23일, 아이즈와카마쓰시의 한 병원에서 향년 88세로 사망했다.[44] 사후 정3위에 추서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32년 5월 24일 후쿠시마현 미나미아이즈군 다지마정(현재의 미나미아이즈정)에서 태어났다.[34][35] 그의 할아버지는 메이지 시대에 중의원 의원을 지냈으며[2], 아버지 와타나베 또자에몬은 후쿠시마현의회 의원과 다지마 정장을 역임했다.[3][4] 아버지가 사망한 후, 큰 형(또자에몬을 습명) 역시 다지마 정장을 2기 동안 지냈다.[3][4]후쿠시마현립 아이즈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36] 고무로 나오키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이후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 진학했다.[36] 대학 시절에는 웅변회에서 활동했으며, 이때 동기 회원 중 한 명이 훗날 자민당 의원이 되는 후지나미 다카오였다.[36][2] 같은 학부 2년 선배로는 정치 평론가 미야케 히사유키가 있었다. 또한 야구부에 소속되어 있던 후쿠시마 가즈오, 히로오카 타츠로를 고향으로 초대해 자신의 모교인 아이즈 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를 부탁하기도 했다.[5] 이 인연으로 히로오카와는 이후에도 친분을 유지했다.
대학 재학 중 자유당의 정치인 이시바시 단잔의 비서가 되었으나,[37] 20세 때 처음 참여한 총선에서는 사회당 우파 서기장이던 아사누마 이네지로에게 투표했다. 그는 이시바시와 아사누마 모두 와세다 대학 선배였기에 위화감이 없었다고 밝혔다.[37] 이후 핫타 사다요시의 비서를 지냈다.[36]
1959년 4월, 후쿠시마현의회 의원 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천을 받아 출마하여 당선되었다.[38] 이때 자서식 투표 방식인 일본에서 유권자들이 이름을 쉽게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발음은 같지만 표기를 '恒蔵'에서 '恒三'로 변경했다.[38] 현의원으로 재직하며 자민당 후쿠시마현지부 연합회 정무조사회장을 역임했다.[36] 1963년에 재선에 성공했으나, 이후 핫타 사다요시의 선거 유세를 돕다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1967년 3월 현의원직을 사임했다.[36]
2. 2. 정치 경력
자유당의 정치인 이시바시 단잔의 비서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나, 첫 총선에서는 사회당 우파의 아사누마 이네지로에게 투표하기도 했다. 그는 두 사람 모두 와세다 대학 선배였기에 위화감이 없었다고 술회했다.[6][37] 이후 핫타 사다요시의 비서를 거쳐 1959년 4월, 후쿠시마현의회 의원 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선거 출마 시 이름을 기억하기 쉽도록 기존의 '恒蔵(쓰네조)'에서 발음이 같은 '恒三(고조)'로 바꾸었고, 이후 호적상 이름도 변경했다.[7][38] 현의원 시절 자민당 후쿠시마현지부 연합회 정무조사회장을 지냈으나, 2기 재임 중이던 1967년 3월, 핫타의 선거운동과 관련된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의원직을 사퇴했다.[2][36]1969년, 메이지 100주년 기념 특별사면으로 공민권 정지가 해제되자 곧바로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2][36]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이즈의 케네디'를 자처하며 선거운동을 펼쳐 당선되었다. 당선 후 자민당에 추가 공천되었는데, 당시 자민당 간사장이던 다나카 가쿠에이는 그에게 공천을 주지 않았던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와타나베는 회고했다.[8][39] 다나카는 자신이 속한 사토 에이사쿠 파벌(주산회) 가입을 권유했으나, 와타나베는 자신이 아이즈번 출신이고 사토 총리가 조슈번 출신임을 들어 보신 전쟁의 역사를 언급하며 "조슈의 가신이 될 수는 없다"고 거절하고 무파벌로 남았다. 이후 1972년 다나카가 자신의 파벌(칠일회)을 결성하자 이에 참여했다.[9][40]
자민당 내에서는 상공족 의원으로 활동하며 경력을 쌓았다. 1974년 통상산업정무차관, 1981년 중의원 상공위원장을 지냈다. 1983년 제2차 나카소네 내각에서 후생대신으로 처음 입각하여 '저출산 고령화'라는 용어를 국회 답변에서 사용하며 연금법 및 의료보험법 개정에 힘썼다고 알려져 있다.[10] 그의 후생상 재임 중 이른바 '터키탕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이후 1987년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 1989년 제1차 가이후 내각에서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1991년 미야자와 내각에서 통상산업대신을 역임했다.
1987년 다케시타 노보루가 다나카파에서 독립하여 자신의 파벌인 경세회를 창설하자 이에 참여하여, 오자와 이치로, 하시모토 류타로 등과 함께 다케시타파 7봉행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이후 리크루트 사건, 도쿄 사가와큐빈 사건 등 정치 개혁 요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1993년 자민당을 탈당하여 신생당, 신진당 창당에 참여했다. 신진당 부당수 등을 거쳐 1996년 중의원 부의장에 취임했으며, 이후 민주당에 합류하여 활동하다 2012년 정계를 은퇴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을 참고하라.
2. 2. 1. 자민당 탈당과 신당 참여
1993년 리크루트 사건, 도쿄 사가와큐빈 사건 등 부정부패 논란으로 정치 불신이 커지는 가운데 자유민주당이 정치 개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오자와 이치로와 하타 쓰토무 등과 함께 자민당을 탈당하여 신생당 결성에 참여했다.[2] 이후 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이 무너지고 신생당이 해체되자 신진당 창당에 합류했다.신진당에서는 간사장 대리, 정무조사회장 겸 국회운영위원장, 총무회장, 부당수 등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1996년에는 중의원 부의장에 취임했다. 당초 부의장직에 긍정적이지 않았으나, 와세다 대학 웅변회 후배인 오부치 게이조가 중의원 의장에 내정되었다는 설득에 수락했다. 그러나 1963년 중의원 선거 당선 동기인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의 설득으로 오부치가 의장직을 고사하면서, 결국 이토 소이치로가 의장에 취임했다.
부의장 취임 시 관례에 따라 당적을 이탈했는데, 그 사이 신진당은 내분으로 해산되어 자유당, 신당 우애, 신당 평화, 여명 클럽, 개혁 클럽, 국민의 소리의 6개 정당으로 분열되었다. 와타나베는 이들 중 어느 정당에도 속하지 않고 무소속 모임에 참여했다. 회파는 민주당·무소속 클럽에 속했으며, 선거에서는 여당인 공명당이나 보수신당의 추천을 받기도 했다.
2000년 중의원 부의장에 재선되었다. 야당 측에서 선출하는 것이 관례인 부의장직에 야당은 이시이 하지메를 지지했으나, 여당 측, 특히 당시 자유민주당 간사장이었던 노나카 히로무의 강한 의향으로 와타나베가 후보로 옹립되었다. 이는 공명당을 강하게 비판하며 자자공 연립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이시이에 대한 견제 때문이었다. 노나카의 주도로 이루어진 와타나베 옹립에 대해 야당 4당은 "노나카 간사장의 사적인 원한", "폭거"라며 강하게 반발했다(하토야마 유키오, 사토 다카오). 야당들은 항의의 표시로 의장 선거에서 백지 투표를 하고 부의장 선거에서는 이시이에게 투표했지만, 결국 의석수 차이로 와타나베(287표)가 이시이(189표)를 누르고 재선되었다. 와타나베는 중의원 부의장으로 총 2,498일간 재임하여 역대 최장 재임 기록을 세웠다.
2. 2. 2. 중의원 부의장
1993년 자유민주당을 탈당한 후, 신생당을 거쳐 신진당 결성에 참여했다. 신진당에서는 간사장 대리, 정무회장 겸 국회 운영 위원장, 총무회장, 부당수를 역임했으며, 1996년 중의원 부의장에 취임했다.당초 와타나베는 부의장 자리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와세다 대학 웅변회 후배인 오부치 게이조가 중의원 의장에 내정되었다는 설득에 부의장직을 수락했다. 그러나 정작 오부치는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총리의 설득으로 의장직을 고사했고, 결국 이토 소이치로가 중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부의장 취임 시 관례에 따라 당적을 이탈했는데, 그 사이 소속 정당인 신진당이 내분으로 해산되어 자유당, 신당 우애, 신당 평화, 여명 클럽, 개혁 클럽, 국민의 소리 등 6개 정당으로 분열되었다. 와타나베는 이 중 어느 정당에도 합류하지 않고 무소속의 회에 참여했다. 당시 회파는 민주당·무소속 클럽이었으며, 선거에서는 여당인 공명당이나 보수신당의 추천을 받기도 했다.
2000년에는 중의원 부의장에 재선되었다. 관례상 부의장은 야당에서 선출하는데, 당시 야당 측은 이시이 하지메를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여당 측, 특히 자민당 간사장 노나카 히로무의 강한 의향으로 와타나베가 부의장 후보로 옹립되었다. 이는 공명당을 강하게 비판하던 이시이가 당시 자자공 연립 정권에 불편하다는 여당 측, 특히 노나카의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노나카의 주도로 와타나베가 옹립되자 야당 4당은 "노나카 간사장의 사적인 원한", "여당을 위한 폭거"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야당들은 항의의 표시로 찬성할 예정이었던 의장 선거에서 백지 투표를 하고, 부의장 선거에서는 이시이에게 투표했다. 하지만 표결 결과 와타나베가 287표, 이시이가 189표를 얻어 와타나베가 부의장에 재선되었다.
와타나베는 중의원 부의장으로 통산 2,498일을 재임했으며, 이는 중의원 창설 이래 최장 재임 기록이다.
2005년 9월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에 입당하여 후쿠시마 4구에 출마했다. 와타나베는 아이즈 지방에서 전통적으로 강한 지지 기반을 가졌으나, 이 선거에서는 자민당 후보 와타나베 아쓰시(혈연 관계 없음)에게 약 7,000여 표 차이로 쫓기는 등 고전했다. 와타나베 아쓰시는 비례대표로 부활했다. 또한 이 선거 과정에서 와타나베 고조의 선거 운동원 6명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벌금형을 선고받는 등 논란이 있었다.

2006년 2월, 호리에 메일 문제로 마에하라 세이지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집행부가 총사퇴하자, 하토야마 유키오 간사장의 요청을 받아 후임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했다. 간 나오토나 야마오카 겐지 등 국회 운영에 능숙한 베테랑들이 고사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인선이었다. 중의원 부의장을 지낸 당내 최고 원로가 국회대책위원장을 맡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여당인 자민당 내에서도 놀랍다는 반응이 나왔다.
취임 직후 와타나베는 여러 방송에 출연하여 9월로 예정된 민주당 대표 선거를 앞당겨야 한다거나 나가타 히사야스 의원의 사직을 요구하는 등의 발언을 하여, 하토야마 간사장이 이를 수습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한편, 호리에 메일 문제와 관련해서는 2006년 3월 15일 TBS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 2. 3. 민주당 합류 이후
2005년 9월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에 입당하여 선거에 나섰다. 와타나베는 아이즈 지방에서 확고한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선거에서는 자민당 후보 와타나베 아쓰시 (성만 같을 뿐 혈연 관계는 없음)에게 약 7,000여 표 차이로 추격당했고, 와타나베 아쓰시는 비례 부활에도 성공했다. 또한 와타나베 고조의 선거 캠프에서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운동원 6명이 체포되어 모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2006년 2월, 호리에 메일 문제로 민주당 집행부가 총사퇴하자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했다. 이는 국회 운영에 능통한 간 나오토나 야마오카 겐지 등이 모두 고사하는 상황에서 간사장 하토야마 유키오가 간청하여 수락한 것이었다. 중의원 부의장을 지낸 원로 정치인이 국회대책위원장을 맡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취임 직후 와타나베는 여러 텔레비전과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같은 해 9월로 예정된 민주당 대표 선거를 앞당기고 나가타 히사야스 의원의 사퇴를 요구하는 발언을 하여 하토야마 간사장이 이를 수습하느라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한편, 호리에 메일 문제에 대해서는 TBS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 같은 해 9월 국회대책위원장에서 물러난 뒤 민주당 최고고문이 되었다.
2006년 11월 12일에 치러진 후쿠시마현 지사 선거에서는 자신의 비서를 오랫동안 지냈고 당시 참의원 의원(민주당 소속)이었던 조카 사토 유헤이를 지지하여 당선시켰다. 전임 지사였던 사토 에이사쿠 역시 와타나베와 가까운 관계였다.
2007년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오자와 이치로가 야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할 경우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선언하자, 와타나베 역시 "야당이 자민·공명 연립 여당의 의석수를 넘지 못한다면 오자와 대표뿐 아니라 나도 정계를 떠나겠다"고 밝혔다. 선거 결과 민주당은 압승을 거두었다.
같은 해 10월 4일, 자신의 정치 단체인 '신시대 모임'이 작성한 정치자금수지보고서와 관련된 문제가 불거졌다. 1993년부터 2004년까지 12년간 조카인 참의원 의원 사토 유헤이의 맨션을 사무소로 사용했다고 기재했으나 이것이 허위 사실임이 드러난 것이다.[41] 이를 통해 사무소 비용 약 9900만엔, 인건비와 수도광열비를 포함해 총 1.7824억엔을 정치자금으로 처리했다. 또한, 2000년에 사망한 모임 대표의 서명과 날인을 계속 사용해 온 사실도 밝혀졌다. 와타나베의 비서는 "실제 사무소는 의원회관"이라며 "보고서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민주당 내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와타나베는 최고고문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약 3개월 만인 2008년 1월 8일 최고고문에 복귀했다.
2009년 10월 26일 민주당 양원의원총회에서 최고고문 재임이 승인되었으며,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총리대신 사임 후 간 나오토 대표 체제에서도 최고고문직을 유지했다.
원래 원자력 발전에 긍정적인 입장이었으나, 2011년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탈원전 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모리 요시로 전 총리와의 대담에서 "안전 신화를 믿고 수도권에 에너지를 보내왔던 후쿠시마현민이 원전 사고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 "앞으로의 간접 피해를 생각하면 원자력 발전을 용서할 수 없다. 장래에는 원자력 발전 제로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42] 그러나 같은 해 5월 발족한 지하식 원자력 발전소 정책 추진 의원연맹의 고문을 맡기도 했다.
2012년 11월 15일, 고령을 이유로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후계자는 따로 지명하지 않았다. 은퇴 후에는 민주당을 거쳐 국민민주당 후쿠시마현 연합회 최고고문을 맡았다.[43]
2020년 8월 23일 새벽 2시 8분,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쓰시의 한 병원에서 향년 88세로 사망했다.[44] 사후 정3위에 추서되었다.
2. 2. 4. 정계 은퇴
2012년 11월 15일, 와타나베는 고령을 이유로 다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는 후계자를 따로 지명하지 않았다. 다음 날인 11월 16일 중의원이 해산되면서 의원직을 잃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은퇴하면서 "늙은 병사는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11]정계 은퇴 후에는 민진당을 거쳐 국민민주당 후쿠시마현 연합회 최고 고문을 맡았다.[12]
2. 3. 사망
2020년 8월 23일 2시 8분, 노쇠로 인해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쓰시의 병원에서 향년 88세로 사망했다.[13] 사망 당일 정3위에 추서되었으며, 은배 한 벌이 수여되었다.[14]3. 정책 및 정치적 입장
(내용 없음)
3. 1. 원자력 정책
와타나베 고조는 원자력 발전 정책을 추진했던 인물이다. 후생대신 시절인 1984년 1월, 원자력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원전을 만들면 만들수록 국민은 오래 살 수 있다. 일본의 에너지 문제 해결은 원전이라는 것이 나의 정치 철학이다."라고 발언하여 반원전 그룹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이는 보조금 없이는 어려운 농업 중심의 후쿠시마현 현실을 지적하려 했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후쿠시마현 하마도리 지방은 원전이 밀집한 지역이지만, 와타나베의 고향인 아이즈 지방은 일본의 주요 수력 발전 지대이다(다다미 특정 지역 종합 개발 계획 참조).그러나 2011년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후쿠시마현 출신 국회의원으로서 그는 탈원전을 주장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2012년 8월, 동기인 모리 요시로 전 총리와의 대담에서는 "나는 탈원전이다. 안전 신화를 믿고 수도권에 에너지를 보내온 후쿠시마현민이 원전 사고로 엄청나게 고생하고 있다"고 말하며, "앞으로의 간접 피해를 생각하면, 원전은 용서할 수 없다. 장래에는 원전 제로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9]
한편, 이러한 탈원전 주장과는 별개로 2011년 5월에는 지하식 원자력 발전소 정책 추진 의원 연맹 (약칭 지하 원전 의련)의 고문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4. 논란 및 사건사고
(작성할 내용 없음)
4. 1. 공직선거법 위반
(작성할 내용 없음)4. 2. 정치자금 보고서 허위 기재
2010년 1월, 오자와의 전 비서인 이시카와 도모히로 중의원 의원이 정치 자금 규정법 위반으로 체포된 문제에 대해 기자들의 질문을 받자, 와타나베는 "안됐잖아, 이시카와 군은. 너희, 누가 나쁜지 정도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잖아"라고 답하며 간접적으로 오자와의 책임을 시사했다. 또한, 오자와 간사장 등 당 집행부를 비판한 우부카타 사치오 부간사장이 오자와의 의향을 따른 다카시마 요시미쓰 수석 부간사장에 의해 해임되자, 와타나베는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게 돼 버리지 않나. 비서가 3명이나 체포된 사람(오자와) 쪽이 더 무거운 책임이 있다"고 비판적인 입장을 밝혔다.5. 역대 선거 기록
연도 | 선거 종류 | 회차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순위 | 결과 | 선거 제도 |
---|---|---|---|---|---|---|---|---|---|---|
1959년 | 지방선거 | 4회 | 후쿠시마현의회 의원 | 후쿠시마 | 자유민주당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63년 | 지방선거 | 5회 | 후쿠시마현의회 의원 | 후쿠시마 | 자유민주당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69년 | 총선거 | 32회 | 중의원 의원 | 후쿠시마현 제2구 | 무소속 | 45,761 | 11.5 | 5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2년 | 총선거 | 33회 | 중의원 의원 | 후쿠시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57,846 | 13.5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6년 | 총선거 | 34회 | 중의원 의원 | 후쿠시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57,553 | 13.3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9년 | 총선거 | 35회 | 중의원 의원 | 후쿠시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73,390 | 17.4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80년 | 총선거 | 36회 | 중의원 의원 | 후쿠시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75,029 | 17.3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83년 | 총선거 | 37회 | 중의원 의원 | 후쿠시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88,116 | 21.1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86년 | 총선거 | 38회 | 중의원 의원 | 후쿠시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04,300 | 24.1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90년 | 총선거 | 39회 | 중의원 의원 | 후쿠시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79,719 | 17.4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93년 | 총선거 | 40회 | 중의원 의원 | 후쿠시마현 제2구 | 신생당 | 97,303 | 22.4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96년 | 총선거 | 41회 | 중의원 의원 | 후쿠시마현 제4구 | 신진당 | 93,960 | 48.73 | 1위 | 당선 | 소선거구제 |
2000년 | 총선거 | 42회 | 중의원 의원 | 후쿠시마현 제4구 | 무소속 모임 | 102,631 | 50.7 | 1위 | 당선 | 소선거구제 |
2003년 | 총선거 | 43회 | 중의원 의원 | 후쿠시마현 제4구 | 무소속 모임 | 97,014 | 52.26 | 1위 | 당선 | 소선거구제 |
2005년 | 총선거 | 44회 | 중의원 의원 | 후쿠시마현 제4구 | 민주당 | 91,440 | 48.48 | 1위 | 당선 | 소선거구제 |
2009년 | 총선거 | 45회 | 중의원 의원 | 후쿠시마현 제4구 | 민주당 | 91,695 | 49.4 | 1위 | 당선 | 소선거구제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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